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누가 하느냐보다 어떤 방법·마음가짐으로 하는가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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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치란 무엇인가

◇신사임당과 율곡 선생이 태어난 보물 제165호 '오죽헌'.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선조 초 새로운 정치의 목표·방법 잘 안다고 확신했던 율곡

조정서 부패한 구세력 몰아냈는데도 민생 개선 안 되자 고민

조정 복귀 후 국정개혁과 동인·서인의 협력 모색했지만 실패

율곡이 조정에 처음 나왔을 때 올바른 정치의 내용과 그것에 도달하는 길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탁월한 지적 능력과 반듯한 마음으로도 자기 시대의 정치가 도달해야 할 목표와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알지는 못했다. 우리는 정치에 대한 율곡의 준비된 생각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수정하고 그것에 접근하기 위해 어떻게 분투했는가 하는 것을 보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사림(士林)이 집권한 것은 선조 즉위(1567년)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그 2년 전인 1565년부터 시작됐다. 훈구파의 정치적 기반인 문정왕후가 그해 4월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강력한 권력이 그 중심 인물의 사망으로 갑자기 몰락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율곡은 그 한 해 전인 1564년에 29세 나이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구체제가 무너지자 새로운 정치를 염원하는 상소들이 조정에 쇄도했다. 이것들 중 주목되는 것이 귀양을 갔다가 약 20년 만에 조정에 돌아온 노수신, 유희춘 같은 인물들의 상소였다. 그런데 이들의 상소 내용을 보면 뜻밖이다. 그 내용에 민생과 관련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조선의 지식인과 관료들에게 가장 존경받았던 사람은 퇴계 이황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새 시대의 국정 운영에 대해 묻자 그는 자신이 국가 운영에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것은 겸손한 말이었지만 솔직한 말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새 시대의 정치를 풀어 갈 국정 운영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는 이념이 대립했던 시대였지, 정치가 무엇에 봉사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던 시대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선조 초 율곡은 새로운 정치의 목표와 방법을 잘 안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당시 그의 생각은 동료들과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거칠게 요약하면 사림이 건의하고 주장하는 대로 나라를 운영하면 정치가 바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율곡의 이런 생각은 1572년(선조5년)에 영의정 이준경이 사망하면서 명료하게 드러났다. 이준경은 죽음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마지막 상소에서 율곡과 그 동료들을 비판했다. '붕당의 사론(私論)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없고 또 법에 어긋나지 않아도 (신진들이) 자신들과 한마디만 맞지 않으면 배척해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율곡은 이준경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가 말한 '붕당의 사론'이란 율곡을 포함한 신진들의 주장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율곡은 붕당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붕당이 군자당인지 소인당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군자들은 붕당을 지어도 문제가 안 되고, 그들의 당론은 사론이 아니라 공론이라는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군자집단'과 '소인집단'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집단 구성원 전체가 선하거나 악한 그런 집단이 있겠는가.

선조 7년 1월에 율곡은 '만언봉사'를 올린다. 이것은 사림이 조정에서 부패한 구세력을 몰아냈는데도 민생이 개선되지 않고 국정이 계속 혼란스러워 바른 정치가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의 소산이었다. 사림이 국정을 운영하기만 하면 여러 사회적 문제가 신속하고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율곡뿐 아니라 신진세력 모두의 암묵적 믿음이었다. 그가 다른 신진들과 달랐던 것은 왜 그 예상이 어긋났는지 계속 고민했다는 점 정도다. 다른 신진들은 이제 자신들의 유리해진 정치적 처지에 만족하고 있었다.

율곡은 사림 집권 후에도 조정에서 개혁이 추진되지 않았던 이유를, 정치가 '시의(時宜)'를 모르고 일을 하면서 '실공(實功)'에 힘쓰지 않은 것에서 찾았다. 율곡에 따르면 당시 임금은 명망 있고 어진 이를 뽑아 쓰고 있었다. 조정에는 사림이 자신들 주장을 활발히 개진했다. 그럼에도 현실은 애초에 기대했던 방향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않았다. 바른 정치와 관련된다고 여겼던 사항들이 실제로는 별 관계가 없었던 것이 증명된 것이다. '시의'란 현실에 맞게 법제를 개혁해 1회성이 아닌 제도적인 민생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고, '실공'이란 일을 하는 데에 성의가 있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의가 올바른 정치적 목표 및 방식의 선택이라면, 실공은 진정성 있는 과감한 실천을 뜻했다. 이로써 율곡은 '사람'의 문제에서 '방법과 태도'의 문제로 정치의 방법론을 급격히 전환시켰다. 누가 정치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목표를 위해서 어떤 방법과 마음으로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율곡은 4년 만인 1580년 12월에 조정에 복귀했다. 당시 조정 상황은 동인들이 스스로를 군자당, 서인을 소인당으로 구분해 서인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데 거의 성공하고 있었다. 민생은 정치에서 완전히 실종돼 있었다. 율곡은 조정에 복귀한 날부터 두 가지를 분명히 했다. 하나는 세금제도 개혁을 중심으로 한 국정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동인과 서인의 협력이었다. 전자가 정치의 목표라면 후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결국 이 두 가지 모두에 율곡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후배들인 동인들에게 소인으로 탄핵됐고, 1584년 1월에 사망한다. 흥미로운 것은 율곡이 이즈음에 한 다음 발언이다. “지금 서인을 옳다고 하는 자라고 해 다 군자인 것도 아니요, 동인을 옳다고 하는 자라고 해 반드시 모두 소인인 것도 아니다.” 집단 전체가 군자나 소인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가 지향하는 정치 목표와 방법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누가 선언하 듯 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대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편에서는 만들어 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발견해 가는 것이다.

율곡 역시 벼슬 생활을 통해 그것을 만들어 가고 발견해 나갔다. 그가 만들고 발견해 나갔던 정치가 그의 시대에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음은 그 이후 시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가지고 그를 소환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그가 걸었던 길이 당대는 물론 역사적 차원에서 유의미했음을 증명한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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