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철저한 현실 인식 바탕…한결같이 '안민<安民>'을 개혁정책 원칙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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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책의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가

◇1574년(선조 7년) 1월 율곡 이이가 왕에게 올린 상소문 '만언봉사'.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는 결국 낙향했다.

모호하고 추상적일 수 있는 개념

가장 현실적인 세금 문제에 적용

핵심적 영역으로 공물 개정 주목

70년 후 대동법의 성립으로 해결

율곡이 긴 관료생활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1564년(명종 19년) 29세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해 1584년(선조 17년)년 1월에 사망했다. 이 20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도 선조 9년 초부터 13년 12월까지 약 5년 정도는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었다. 율곡이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최대 15년 정도였다. 그런데 이 15년도 모두 율곡이 자신의 색깔을 드러낸 정책을 펼친 시기로 볼 수는 없다. 1574년(선조 7년) '만언봉사' 이후에야 율곡은 새로운 정치적 목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언봉사'가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결국 낙향했다.

우리가 율곡의 정책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낙향한 상태에서 올린 상소문과 선조 13년 12월 이후 조정에 복귀한 이후에 보여준 모습을 통해서다. 이렇게 보면 율곡이 자기 색채를 드러낸 정책을 실제로 추진했던 것은 선조 13년 12월부터 그가 사망한 선조 17년 1월까지이다. 3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다. 율곡의 제자 이귀(李貴)는 스승 사후, 스승을 비방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스승을 위해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다. 여기서 그는 스승이 천부의 자질을 가지고도 평생의 포부를 하나도 실현할 수 없었다고 몹시 안타까워했다. 이귀 말처럼 율곡이 추진했던 정책은 이이 살아생전에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 이익(1681∼1763년)은 조선시대에 경세(經世), 즉 국가운영에 대해 아는 사람으로 단 두 사람을 꼽는다. 율곡과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저자 유형원(柳馨遠·1622∼1673년)이 그 두 사람이다. 흥미로운 것은 '반계수록'에서 유형원은 자신의 경세론에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율곡을 지목했다. '반계수록'에는 수많은 중국의 경세 관련 서적이 등장한다. 이 모든 참고문헌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율곡의 저술들이다.

율곡에 대한 이귀의 기억과 유형원·이익의 기억은 상충한다. 하지만 각자의 기억은 모두 사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율곡이 추진했던 정책은 당대에는 철저하게 실패했지만 그의 사후 조선의 국가 운영에 방법론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형원·이익은 이이가 추진했던 정책의 어떤 점에 주목했던 것일까?

율곡은 조선시대 사림세력의 현실적 임무가 바뀌는 시기에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기묘사화(1519년) 이후 중종과 명종 대 내내 사림은 정치적으로 공격받는 처지였다. 1565년 문정왕후의 사망으로 구체제가 붕괴되기까지 사림에 대한 탄압이 계속됐다. 45년이 넘는 시간으로 거의 두 세대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 시기에 사림의 가장 큰 과제는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도학(道學)이 발전했다. 도학 역시 성리학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사림의 정치적·현실적 처지를 반영했기에 매우 실천적인 성격을 지녔다. 문정왕후의 사망과 선조의 즉위로 사림은 조정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림은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 상황은 사림의 현실적 임무가 바뀌었음을 뜻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를 운영하며 국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세력이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태도와 지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고 있었다.

율곡과 함께 조정에 있던 다른 모든 인물은 새로운 시대에 실시해야 할 국가 정책과 관련해 양극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추상적 원칙을 말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파편적 폐단에 대한 대응책만을 말했다. 그에 비해 율곡은 도학에 기반한 경세론의 큰 틀과 방향을 제시했다. 퇴계 이황이 주희의 성리학 개념을 가지고 자기 시대의 성리학을 구성하는데 성공했다면, 율곡은 물려받은 도학의 개념을 이용해서 조선의 경세론을 구축했던 셈이다.

율곡은 도학의 실천적 성격에 주목했다. 그는 그 실천성의 내용을 확장했다. 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는 것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데까지 확장했던 것이다. 율곡은 '한결같이 안민(安民)을 개혁정책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一以安民爲義). 당시 관료와 지식인들에게 '도(道)'와 '의(義)' 자체는 정치윤리적 차원에서 익숙한 관념이었다. 하지만 '도'와 '의'를 민생의 원칙인 '안민'과 곧바로 연결해 사고하는 것은 매우 낯선 방식이었다. 이이는 도학을 올바른 사회경제제도로, 그리고 다시 올바른 제도의 목적을 안민으로 설정했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갔다.

율곡은 어찌 보면 모호하고 추상적일 수 있는 '안민'이라는 개념을 가장 현실적이고 갈등적 영역인 부세, 즉 세금 문제에 적용했다. 그는 조정이 부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여하에 따라 백성들은 임금을 임금으로도 받들고 원수로도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천하 국가는 저절로 안전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안전하게 해야만 안전해진다고 말했다. 이는 율곡이 관성적인 현실 인식에 안주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는 현실 그 자체의 역동적 가변성과 위험성을 잘 이해했다. 그리고 마침내 율곡은 세금 문제의 핵심적 영역으로 공물 개정에 주목했다. 이것은 실로 놀랍도록 탁월한 안목이었다. 이 문제는 70년 후 대동법(大同法)의 성립으로 해결됐다. 대동법 성립 과정에서 가장 논쟁이 되었던 문제가 바로 이 재정과 안민이 상충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정부가 경제적 성장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분배를 추구할 것인지를 놓고 충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율곡은 공물 개정이 재정과 안민의 상반돼 보이는 두 가치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음을 꿰뚫어 봤다.

율곡은 자신의 경세론을 앞 세대의 누구에게서도 전해 받지 못했다. 그는 중종·명종 대의 훈척정치에서 국정 운영의 방법론을 얻을 수 없었고, 이황의 학문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이황의 도학은 신진사림들에게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었지만, 새롭게 도래한 시대에 국정 운영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기능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이황의 제자들인 신진사림들은 자신들의 도학을 경세론으로 연결시킬 수 없었다. 결국 율곡은 물려받은 학문과 자신이 경험한 현실이라는 두 가지 재료만으로 자신의 경세론을 빚어낼 수밖에 없었다. 율곡이 펼쳐 보인 정책의 생명력은 이렇듯 그의 철저한 현실 인식에 있었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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