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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백성의 삶이 편안해야 한다는 '안민(安民)' 주장한 율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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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생은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율곡 이이는 청주목사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의 삶 '민생'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청주향약(서원향약)을 만들어 쉽고 구체적으로 백성의 마음을 다스렸다. 사진은 현재 청주 상당구청 내 청주동헌 터로 율곡 선생이 1571년 6월부터 1572년 3월까지 청주목사로 근무하면서 청주향약을 제정, 시행한 것과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동헌 앞에 소나무를 심었다는 것을 기념해 후임 목사가 세운 비석.

'임꺽정의 난' 사회의 문제로 인식

민초들이 도적으로 변하는 까닭은

위정자 제 역할 못 한 것으로 판단

양민들 어렵게 만드는 '폐단' 찾아

조선 정치 개혁하는 데 자신 던져

율곡의 시대는 임꺽정의 시대이기도 했다. 임꺽정이 활동하던 바로 그 시기, 그 지역에 율곡이 머물고 있었다. 율곡은 1561년 5월에 부친상을 당해 그의 친가인 파주에서 3년 상(喪)을 치르게 된다. 율곡은 임꺽정의 난을 임꺽정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의 문제로 인식했다.

율곡이 생각하기에 백성들이 도적이 되는 까닭은 바로 위정자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막연한 수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지식인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에서 '민유방본(民惟邦本)'이라는 용어를 입에 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구체적인 내용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율곡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용어에 살을 붙여 실체를 만들었다. 나라의 근본이라고 인식됐지만 그 실체를 갖지 못한 채 원칙적인 용어에만 머물던 백성[民]이란 단어가 자신의 몸을 가질 때, 자신의 실체를 가질 때 그 모습을 율곡은 민생(民生)이라 불렀다. 민생이란 백성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말한다. 율곡이 본 당시의 민생은 노약자들은 죽어 나가고 장정들은 도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율곡이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에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그들의 '해방구'로 만들어 버렸던 임꺽정의 난은 진압됐다.

3년 상을 마치고 율곡이 출사한 다음 해에 문정왕후가 사망함으로 조선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문정왕후의 사망은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명종 시대 내내 최고 권력자로서 독점적 지위를 향유한 윤원형 등을 중심으로 한 권간(權姦) 세력의 몰락과 을사사화로 중앙 정치와 제도권으로부터 소외됐던 세력들의 정치적 복권을 의미했다.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실록은 '춤을 추며 환호'하는 백성들의 모습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 주고 있다. 율곡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시기는 바로 이렇게 새로운 희망으로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오른 시기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는데도 민생은 조금도 나아지지를 못했다. 나아지기는커녕 윤원형 등 권간 세력들이 집권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민생은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위정자들은 권간들이 사라졌다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민주화'가 됐고, '촛불혁명'이 성공했다는 그 감격만으로 당시를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여기고 싶어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율곡의 화두가 됐다. 율곡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민생은 하나도 나아지지 못하고 오히려 더 악화됐는지를 규명하는 것을 자신의 화두로 삼게 됐다. 율곡이 찾아낸 것이 바로 '폐(弊)'였다. 율곡의 관직 생활은 전(前) 시대의 권간들이 남긴 유폐(遺弊)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시작됐다. 율곡의 유폐에 대한 관심은 이후 폐법(弊法)이라는 조금은 더 구체적인 문제로 발전했다. 율곡은 백성들의 삶[민생] 속에서 그들을 가장 어렵게 만들고 있던 '폐'를 찾아 조선의 정치 현실과 결부시켰고,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재조망해 조선 정치를 개혁하는 데 자신의 삶을 던져 버렸다.

'백성[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민생(民生)'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천착한 율곡은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야 한다는 안민(安民)을 주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율곡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의 차원이 아닌 백성'이' 편안한 안민(安民)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민'은 그 주체가 위정자다. 위정자들이 애민을 강조하면 흔히 백성의 삶[민생]은 사라지고 '백성이 나라의 근본[민본]'이라는 원칙론에 매몰돼 마침내 '애민'이란 구호만 남게 된다. 하지만 '안민'이란 용어는 그 주체가 바로 백성 자신이다. 백성이 사라지면 안민이란 용어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안민은 구체적인 민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치를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측면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인식한 율곡은 '다스림의 도[治道]는 근본을 따라 말[從本而言·종본이언]할 수도 있고, 또한 일을 따라 말[從事而言·종사이언]할 수도 있다'는 중국 송대의 유학자 정자(程子)의 말을 주목했다.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종본이언은 민본(民本)과 연결되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종사이언은 민생(民生)과 연결된다.

종사이언이라는 그 구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율곡은 '도(道)'와 '술(術)'을 구분했다. '도'란 시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삼강(三綱)', '인정(仁政)', '오상(五常)' 등과 같은 것으로 정치에 있어서 가치의 영역이다. 한편 '술'이란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구체적인 정치 행위(수단)를 말한다.

'종사이언'에서 '종본이언'으로 가는 것은 이론적으로 세련화를 지향하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종본이언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현실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결과 자신과 현실의 불일치로 인해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본이언이 없으면 방향성을 상실하게 돼 길을 잃을 수 있다. 결국 양자는 새의 두 날개와 같이 조화를 필요로 한다. 율곡은 양자 간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주목했던 것이다. 조화의 관건은 '소통'이었다.

최진홍 서경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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