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한 해 3연속 장원 화려하게 관직에 첫발…명종 승하 후 3년간 승승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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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정치 입문

서울 광화문 앞.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중심지인 이곳은 500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이 있고, 그 뒤에는 청와대, 그리고 광화문광장과 광화문 앞에는 정부서울청사가 위치해 있다.

경기도 과천, 세종시로 정부의 행정기능이 분산돼 있지만 아직도 한국 행정정치의 상징지는 바로 광화문 앞이다.

또 하나 이곳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민주화 항쟁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 등 역사의 흐름을 바꾼 많은 시민 집회가 광화문 앞 광화문광장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광화문 앞 육조거리는 통행로인 동시에 일종의 광장이었다. 임금이 백성을 만나는 곳이었고, 백성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왕과 신하, 백성이 공존하며 조선을 이끌었던 이곳은 21세기 대한민국 민의의 중심이 됐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소통과 공론의 장으로 통하는 광화문. 율곡은 1564년 7월 생원, 진사에 오르고 8월에 명경급제해 호조좌랑에 임명되며 이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생원시, 진사시, 대과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며 구도장원공이라는 칭송을 얻게 된 것이 바로 이때다.

한 해 3연속 장원을 하며 화려하게 정치무대에 데뷔한 율곡.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할 때까지 3년 동안 호조좌랑,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이조좌랑을 오가며 정6품직의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엘리트 코스로 승승장구했던 율곡은 거침 없었다. 예조좌랑으로 있던 1565년 8월 두 차례 상소를 올려 보우와 윤원형이 국가와 백성을 병들게 하는 원흉임을 지목하고 선비들의 공론에 따라 벌 줄 것을 간청했으며, 같은 해 12월 사간원 정언으로 제수되자 사직 상소를 올리며 “지금 국사는 마치 큰병을 치르고 난 뒤 원기가 회복되지 못해 마디마디 아프고 위급한 지경에 다다랐다”며 매섭게 국정을 비판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율곡은 선비가 꿈꾸는 왕도정치를 꽃피울 기회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직언하며 나라의 개혁을 외쳤다.

32세의 율곡은 16세의 왕 선조에게 끊임없이 직언을 하며 왕도정치의 이상을 꿈꿨다. 1568년 율곡은 사헌부 지평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성균관 직강으로 임명돼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로서 임금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 경연에서 고전을 읽어주는 경연 시독관, 춘추관에서 시정기를 편찬하는 시주관 등 여러 직책을 겸임했다. 휴가를 받아 사가독서를 명 받고 동호문답을 만들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처럼 율곡은 구시대를 뒤로하고 새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끊임없이 개혁을 주장했지만 선조는 개혁을 두려워하며 차일피일 미뤘다. 그동안 꿈꿨던 왕도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율곡은 크게 실망했다. 이후 율곡은 18년간 조정과 향리를 오가며 간헐적으로 벼슬살이를 이어 갔다.

선조 또한 율곡을 가까이 두고 싶어 했으나 가까이 둘 수 없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로 연을 이어 갔다.

글=조상원기자·사진=권태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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