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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율곡에게 길을 묻다]벗과 편지 통해 펼친 성리논변…조선조 성리학의 발전·연구에 큰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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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으로 이룬 율곡의 학문과 기호학파

◇충남 공주시에 있는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는 율곡 이이로부터 시작된 기호학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책과 인물들이 전시돼 있다. ◇ 경기 파주시 파주읍 성현로에 있는 우계기념관. 현대적인 양식의 건축물 안으로 우계 성혼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전시가 펼쳐져 있다. ◇ 우계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삼현수간 영인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이 교류한 편지를 모아 4첩으로 제작한 '삼현수간(三賢手簡)'은 보물 제1415호로 지정돼 있다. 세 벗의 깊은 우정과 높은 학문적 위상을 알 수 있는 편지글은 역사적, 학술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사진위쪽부터)

충남 공주시 국고개길에 위치한 충청남도역사박물관 2층에는 기호학파의 연혁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그 전시물을 살피다 보면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등이 소개돼 있다.

조선시대 경기도와 충청도를 포괄해 불렀던 기호지방은 기호학파가 형성되면서 정치적·학문적으로 정립된 개념이다.

기호학파도 자세히 들어가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과 학맥으로 나뉜다. 율곡과 우계는 둘도 없는 절친이었고 율곡은 이 절친들과 함께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나눴다.

경기 파주에 있는 우계기념관에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이 교류한 편지를 모아 4첩으로 제작한 '삼현수간(三賢手簡)'의 영인본이 전시돼 있다. 보물 제1415호로 지정된 삼현수간 속에 나타나는 세 벗의 깊은 우정과 높은 학문적 위상은 역사적, 학술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

율곡과 성혼, 구봉은 20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쉼 없이 편지를 주고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신변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속 깊은 철학적 담론, 세상을 경영할 정치적 방략까지 그 깊이와 넓이가 한량없다. 참고로 우계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현인으로 추천돼 높은 벼슬을 살았다. 구봉은 뛰어난 시인이었으나 신분 때문에 벼슬에 나가지 못한 선비다.

'아, 슬프다. 하늘은 어찌하여 형에게 따뜻한 마음과 부드러운 몸가짐, 더불어 즐길 줄 아는 넉넉함, 상쾌하고 정결하며 맑게 트인 자질들을 주고 긴 목숨은 주지 않았습니까. 하늘은 어찌하여 형에게 어질고 너그러우며 성실하고 밝으며 차분하고 순수한 학문을 닦게 하고선, 학문을 펼칠 세상을 윤택하게 할 복은 주시지 않았는지요.'

율곡이 죽은 뒤 구봉이 남긴 제문도 삼현수간에 기록돼 있다.

율곡은 “우계는 벼슬에 나아가길 꺼리지만 그의 학문은 저보다 높다”고 선조에게 천거했고, 노비의 후손인 구봉과도 거리낌 없이 교류하며 우정을 이어 갔다. 율곡의 친필 글씨는 남아 있는 것이 매우 희귀한데 삼현수간에 율곡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가 13편이나 실려 있다.

답성호원(答成浩原)은 우계 성혼이 묻고 율곡이 답한 철학적 서신이다. 1572년 우계가 율곡에게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의 관계에 대해 질문했고 율곡이 이에 대해 답신을 보내면서 논변이 시작됐다. 우계와 율곡이 편지를 통해 펼친 성리논변은 조선조 성리학의 발전과 연구에 크나 큰 이정표가 됐다.

이들 세 사람은 서로를 가르치고, 서로에게 배우며, 서로를 성장시켰다. 평생 서로의 삶과 학문에 굳센 버팀목이 된 것이다.

글=조상원기자·사진=권태명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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