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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고전번역총서5 : 강릉지방 향약‧계 자료
- 지은이 : 이규대 외 번역
- 정가 : 비매품
- 발행처 : 율곡연구원
- 발행일 : 2013년 11월 30일
- ISBN :978-89-93075-64-9
페이지 : 598쪽
판 형 : 국판
<도서소개>
『강릉지방 향약‧계 자료』는 강릉의 연곡면(連谷面)․성산면(城山面)․정동면(丁洞面)․초당동(草堂洞)․하남면(河南面) 등지의 향약류와 금란반월계(金蘭半月契)․약국계(藥局契)․모선계(慕先契) 등 각종 계 문서를 번역한 책이다. 이러한 향약․계 문서는 조선시대 강릉지역 향촌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강릉지방 향약․계 자료의 해제
(강릉 원주대 이규대 교수)
이번 향토고전 번역 작업은 강릉지방의 契․鄕約 자료를 대상으로 하였다. 계와 향약은 구분될 수도 있지만, 鄕約契라는 명칭에서 보듯 향약조직 또한 넓은 의미에서 계에 포함시켜 볼 수 있다. 이점에서 이번 작업은 계를 대상으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계와 관련한 문서는 다양하다. 節目과 座目이 근간이 되지만, 절목은 시세에 따라 개정되거나 첨가되며 좌목 역시 仙案이나 世系圖가 첨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밖에도 置簿冊이나 到記를 비롯하여 田案이나 각종 토지매매문서들을 들 수 있다.
契文書는 주민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투영되고 있다는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보잘 것 없는 계문서 하나에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시대상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투영되고 있다. 국가 통치이념으로부터 생활현장의 담론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배어나는 자료가 계문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업은 절목과 여기에 부기된 몇몇 전안과 토지문기 등으로 한정하였다. 즉 좌목이나 치부책․선안․세계도․도기 등은 제외되었다. 이 점은 자료의 방대함으로 모두 수용할 수 없었던 수집과정의 한계이기도 하다.
계는 사회조직이다. 법제적인 조직은 아니다. 이 점에서 계는 주민들의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성되어 운영되었다는 특징을 가지며, 또한 장구한 세월을 지속되었다기보다는 대개는 단속적으로 운영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계의 創契 과정에서 주민들의 자기 내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면, 그 단속적인 과정에서는 자기 혁신을 위한 갈등과 모색을 살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사회조직으로서 계는 기층사회로부터 꿈틀대는 변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지방에서 계문서는 일찍부터 채록이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臨瀛誌』를 비롯한 邑誌類와 제 인사들의 文集類과 제 씨족의 族譜類 등에 각종 계문서가 채록되어 전승되며, 일제 강점기 일본인 어용학자들에 의해 현황파악의 수준에서 자료가 정리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에 근거하여 계 문화의 전통과 지역성을 재인식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음은 부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근년에는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에서 지방사회에 산재한 일차자료를 수집하여『嶺東地方鄕土史硏究資料叢書』로 출간된 바 있으며, 이번 번역 작업은 이 자료의 성과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혀 둔다.
이번 작업에서는 18개 정도의 계첩을 번역하였다. 시기적으로는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생성된 자료들이다. 즉 조선후기의 계첩들이다. 조선후기는 임란의 상흔을 극복하고 재정비되면서 이어지는 농업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또한 이러한 경제적 발전에 편승하여 새로운 생산관계가 형성되고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중인과 평민은 물론 노비들까지 자기 발전을 위한 주체적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후기는 실로 사회변화가 역동적이었고, 이번에 번안한 계첩들은 이러한 사회적 역동성을 배경을 생성된 문서들이다. 이들 문서들을 통해 세기별 운영 실태의 구분 내지는 차이점을 비롯하여 계조직의 총체적 실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이 지방에서 생성되었던 계 조직의 문화적 특성과 아울러 지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내용적으로는 다양하면서도 각기 목적성이 뚜렷하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즉 鄕約․面約․洞約․村契, 藥局契, 彌陀契, 金蘭半月會, 慕先契, 門生契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향약계는 운영 단위에 따라 명칭이 구분된다. 一鄕 즉 고을 단위에서 운영된 향약, 각 면단위에서 운영된 면약, 마을 단위에서 운영된 동약․촌계로 구분된다. 17세기 초반에는 一鄕 단위에서 운영되었으나, 같은 시기 후반에는 각 면단위로 운영되었고, 19세기에 이르면서 동약이나 촌계 형태로 파악된다. 이러한 추이는 그 운영주체가 일향의 사족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마을단위로 주민들에게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이것은 마을공동체가 경제단위로 성장하면서 자기의식이 강화되는데 따른 결과로 보여 진다.
그러나 향약이 시행되는 경우 면약이나 동약․촌계는 거기에 흡수되었고, 향약이 중단되는 경우 면약이 동약․촌계가 다시 결성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이 지방 수령에 의해 향약이 시행되었는데, 이때에는 수령이 직접 절목을 작성하여 각 면단위에 제시하고 아울러 장려금을 면 단위로 지급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향약의 운영이 수령의 지방통치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약국계 역시 17세기 초반에 창계 되었는데, 無醫 無藥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여 인명을 구제하고, 나아가 부모님 질환을 구완하여 효를 다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약국을 설립하고 이곳에 醫官과 醫生을 배치하여 의료인을 양성하고, 각종 醫具와 醫書를 비치하여 의학지식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고, 지방에서 생산되는 약초를 재배하거나 채집하고 중국산 약재를 무역을 통해 확보하여 이곳 약국에 비치하고 활용하였다.
약국계의 출연의 의미는 活人命에 있다. 이를 위해 이 지방 최상층 신분층으로 뜻을 같이 하는 자들로 규합되어 계를 조직하였고, 이들이 각자 재물을 출연하여 자본금으로 삼았으며 아울러 관으로부터 藥田의 지급과 藥漢의 배치 등에서 보조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로서 설립되는 약국의 시혜는 주민 상․하민 모두에 돌아갔다.
이점에서 약국계의 운영은 17세기 양반사족사회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을 평가될 만하다. 무엇보다 鄕里에 대한 자신들의 역할의식과 부모에 대한 효의식이 충만하였고, 家門이나 門中의 이기주의적 성향 보다 一鄕의 공공성이 훨씬 강조되는 풍조를 살필 수 있으며, 중국으로 가는 사신 행렬에 동행하는 醫官을 통한 唐材 무역이라는 실무적인 역량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미타계는 대관령 중턱 만월산 기슭에 자리 잡은 보현사의 신도회이다. 계첩은 肅宗 연간에 작성되었으나, 내용상에서 미타계는 羅末麗初에 조직된 ‘彌陀尊佛道’라는 香徒會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보현사에는 낭원대사의 탑비가 온존하게 보존되어 있고, 여기에 의하면 낭원대사는 당시 명주장군 김순식과 단월관계를 맺고 이곳에 ‘지장선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점에서 미타계는 이 지장선원과 연결되는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미타계의 기능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을 봉안하고 법당을 마련하고 불탑을 조성하는 등 제반 불사를 이끌어 내는 주체가 다름 아닌 미타계 계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계원들은 불가에 귀의한 몸으로 연간 몇 차례의 공식적인 모임인 契會에 참석하여 불도를 닦으면서 수양하였고, 계원들의 사망 시에 靈駕志에 기록하여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를 올리는 것을 들 수 있다.
숙종 연간에 작성된 계첩에서는 전 순장(前 巡將)․안일호장(安逸戶長)․호장(戶長)․공사원(公事員) 등의 직함을 가진 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화재로 소실된 계첩을 중수하기 위해 부사(府司)에 보관 중이던 또 하나의 계첩을 찾아냈다거나, 계를 중수하기 위해 사재를 투입하였다거나, 부사(府司)를 계주인(契主人)으로 설정하는 것이나, 계첩의 서문을 짓는 일이나, 계의 규칙을 정비하는 등 제반사를 이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직함은 모두 지방 관아에 종사하는 인물이었고, 아울러 중인신분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밝히는 미타계의 내력 중에서 ‘中年에 士夫들이 불교를 左道로 규정하고 이 계의 계승이 단절되었으나, 서민들 중에서 뜻있는 자들이 계를 계승하였고, 이제 자신들이 이 계를 이 지방의 成俗․傳統으로 규정하고 중창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미타계가 조선 초기에 숭유억불책의 영향으로 위축되었다가 숙종 연간에 활성화 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고, 이제 이 역할을 지방관아에서 종사하다가 퇴직한 안일호장 층과 현직 호장이 함께 미타계의 주도세력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전․현직 호장층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낭원대사와 그의 스승 범일국사에까지 이른다고 하면, 이들의 사회적 역할에서 강릉단오제의 제 양상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이들이 활동하던 동일한 시기에 ‘대관령국사성황제’가 재정립되고, ‘관노가면극’이 연출되고, ‘대관령국사여성황사’가 설정되고, 강릉농악이 활성화되었다고 한다면, 이들의 역할과 강릉단오제의 제 양상이 갖는 상관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설명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것이 단오제의 숨은 이야기일 수 있다면 더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 같다.
금란반월회는 이 지방 젊은 선비들의 學契이고, 모선계는 자신들의 선조를 숭앙하고 선양하기 위한 宗契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이 지방에 널리 인지되어 있어 여기서는 장황한 설명을 줄이고자 한다. 다만 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부언하자고 하면, 먼저 창계 당시의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목적과 취지 및 사회적 역할 등을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본다. 다음은 후대에 이르면서 나타나게 되는 계의 변화양상이나 후인들의 추모양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계 당시의 양상과 후인들의 추모 양상을 구분하여 단계적이고 체계적으로 계의 변화 발전 양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부언하였다.
끝으로 이번 번안 작업을 마련해 준 김진선 이사장님을 비롯한 율곡교육원에 감사드리며, 실무적인 기획과 추진에 애써주신 정문교 원장님께도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발간사
『강릉지반 향약‧계 자료』의 해제 / 이규대…9
연곡향약문(連谷鄕約文)…15
성산목린상중하계좌목(城山睦隣上中下契座目)…25
성산면향약절목(城山面鄕約節目)…30
성산향약계좌목(城山鄕約禊座目)…42
정동면향약절목(丁洞面鄕約節目)…45
향약입의(鄕約立議)…57
초당동약계절목(草堂洞約禊節目)…62
초당동약령(草堂洞約令)…66
하남면향약계열조성책(河南面鄕約禊列條成冊)…74
하시동촌약계입조(下詩洞村約禊立條)…89
하시동강신계조약(下詩洞講信契條約)…96
금란반월계세계도(金蘭半月契世系圖)…99
삼오제기(三五儕記)…104
약계입의(藥禊立議)…108
약계선안(藥禊仙案)…115
모선계실기(慕先契實記)…126
계추재 문생계첩(桂秋齋門生契帖)…156
경락첩(鏡洛帖)…159
문생계서(門生契序) 임자 3월…163
송호사우계 서(松湖四友契序)…165
향서당(鄕序堂) 『眞珠誌』…168
신구유통행 절목(新舊儒通行節目) 『鄕校實記』(1933)…172
통행문급 절목(通行文及節目) 광해군 갑인(1614)…177
임영족회첩 서(臨瀛族會帖序) 제1…183
경술첩 서(庚戌帖序) 제2…187
무오첩 서(戊午帖序) 제3…188
족회첩 후발(族會帖後跋)…192
기미첩 서(己未帖序) 제4…195
임인첩 서(壬寅帖序) 제5…196
제임영족회첩 후(題臨瀛族會帖後)…198
안변향임 서문[安邊鄕任序]…
향음주의 서문[鄕飮酒義序]…
미타계(彌陀契)…206
판 형 : 국판
<도서소개>
『강릉지방 향약‧계 자료』는 강릉의 연곡면(連谷面)․성산면(城山面)․정동면(丁洞面)․초당동(草堂洞)․하남면(河南面) 등지의 향약류와 금란반월계(金蘭半月契)․약국계(藥局契)․모선계(慕先契) 등 각종 계 문서를 번역한 책이다. 이러한 향약․계 문서는 조선시대 강릉지역 향촌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강릉지방 향약․계 자료의 해제
(강릉 원주대 이규대 교수)
이번 향토고전 번역 작업은 강릉지방의 契․鄕約 자료를 대상으로 하였다. 계와 향약은 구분될 수도 있지만, 鄕約契라는 명칭에서 보듯 향약조직 또한 넓은 의미에서 계에 포함시켜 볼 수 있다. 이점에서 이번 작업은 계를 대상으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계와 관련한 문서는 다양하다. 節目과 座目이 근간이 되지만, 절목은 시세에 따라 개정되거나 첨가되며 좌목 역시 仙案이나 世系圖가 첨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밖에도 置簿冊이나 到記를 비롯하여 田案이나 각종 토지매매문서들을 들 수 있다.
契文書는 주민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투영되고 있다는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보잘 것 없는 계문서 하나에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시대상이 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투영되고 있다. 국가 통치이념으로부터 생활현장의 담론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배어나는 자료가 계문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업은 절목과 여기에 부기된 몇몇 전안과 토지문기 등으로 한정하였다. 즉 좌목이나 치부책․선안․세계도․도기 등은 제외되었다. 이 점은 자료의 방대함으로 모두 수용할 수 없었던 수집과정의 한계이기도 하다.
계는 사회조직이다. 법제적인 조직은 아니다. 이 점에서 계는 주민들의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성되어 운영되었다는 특징을 가지며, 또한 장구한 세월을 지속되었다기보다는 대개는 단속적으로 운영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계의 創契 과정에서 주민들의 자기 내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면, 그 단속적인 과정에서는 자기 혁신을 위한 갈등과 모색을 살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사회조직으로서 계는 기층사회로부터 꿈틀대는 변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지방에서 계문서는 일찍부터 채록이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臨瀛誌』를 비롯한 邑誌類와 제 인사들의 文集類과 제 씨족의 族譜類 등에 각종 계문서가 채록되어 전승되며, 일제 강점기 일본인 어용학자들에 의해 현황파악의 수준에서 자료가 정리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에 근거하여 계 문화의 전통과 지역성을 재인식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음은 부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근년에는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에서 지방사회에 산재한 일차자료를 수집하여『嶺東地方鄕土史硏究資料叢書』로 출간된 바 있으며, 이번 번역 작업은 이 자료의 성과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혀 둔다.
이번 작업에서는 18개 정도의 계첩을 번역하였다. 시기적으로는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생성된 자료들이다. 즉 조선후기의 계첩들이다. 조선후기는 임란의 상흔을 극복하고 재정비되면서 이어지는 농업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또한 이러한 경제적 발전에 편승하여 새로운 생산관계가 형성되고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중인과 평민은 물론 노비들까지 자기 발전을 위한 주체적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후기는 실로 사회변화가 역동적이었고, 이번에 번안한 계첩들은 이러한 사회적 역동성을 배경을 생성된 문서들이다. 이들 문서들을 통해 세기별 운영 실태의 구분 내지는 차이점을 비롯하여 계조직의 총체적 실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이 지방에서 생성되었던 계 조직의 문화적 특성과 아울러 지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내용적으로는 다양하면서도 각기 목적성이 뚜렷하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즉 鄕約․面約․洞約․村契, 藥局契, 彌陀契, 金蘭半月會, 慕先契, 門生契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향약계는 운영 단위에 따라 명칭이 구분된다. 一鄕 즉 고을 단위에서 운영된 향약, 각 면단위에서 운영된 면약, 마을 단위에서 운영된 동약․촌계로 구분된다. 17세기 초반에는 一鄕 단위에서 운영되었으나, 같은 시기 후반에는 각 면단위로 운영되었고, 19세기에 이르면서 동약이나 촌계 형태로 파악된다. 이러한 추이는 그 운영주체가 일향의 사족으로부터 점진적으로 마을단위로 주민들에게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이것은 마을공동체가 경제단위로 성장하면서 자기의식이 강화되는데 따른 결과로 보여 진다.
그러나 향약이 시행되는 경우 면약이나 동약․촌계는 거기에 흡수되었고, 향약이 중단되는 경우 면약이 동약․촌계가 다시 결성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이 지방 수령에 의해 향약이 시행되었는데, 이때에는 수령이 직접 절목을 작성하여 각 면단위에 제시하고 아울러 장려금을 면 단위로 지급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향약의 운영이 수령의 지방통치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약국계 역시 17세기 초반에 창계 되었는데, 無醫 無藥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여 인명을 구제하고, 나아가 부모님 질환을 구완하여 효를 다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약국을 설립하고 이곳에 醫官과 醫生을 배치하여 의료인을 양성하고, 각종 醫具와 醫書를 비치하여 의학지식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고, 지방에서 생산되는 약초를 재배하거나 채집하고 중국산 약재를 무역을 통해 확보하여 이곳 약국에 비치하고 활용하였다.
약국계의 출연의 의미는 活人命에 있다. 이를 위해 이 지방 최상층 신분층으로 뜻을 같이 하는 자들로 규합되어 계를 조직하였고, 이들이 각자 재물을 출연하여 자본금으로 삼았으며 아울러 관으로부터 藥田의 지급과 藥漢의 배치 등에서 보조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로서 설립되는 약국의 시혜는 주민 상․하민 모두에 돌아갔다.
이점에서 약국계의 운영은 17세기 양반사족사회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을 평가될 만하다. 무엇보다 鄕里에 대한 자신들의 역할의식과 부모에 대한 효의식이 충만하였고, 家門이나 門中의 이기주의적 성향 보다 一鄕의 공공성이 훨씬 강조되는 풍조를 살필 수 있으며, 중국으로 가는 사신 행렬에 동행하는 醫官을 통한 唐材 무역이라는 실무적인 역량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미타계는 대관령 중턱 만월산 기슭에 자리 잡은 보현사의 신도회이다. 계첩은 肅宗 연간에 작성되었으나, 내용상에서 미타계는 羅末麗初에 조직된 ‘彌陀尊佛道’라는 香徒會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보현사에는 낭원대사의 탑비가 온존하게 보존되어 있고, 여기에 의하면 낭원대사는 당시 명주장군 김순식과 단월관계를 맺고 이곳에 ‘지장선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점에서 미타계는 이 지장선원과 연결되는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미타계의 기능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을 봉안하고 법당을 마련하고 불탑을 조성하는 등 제반 불사를 이끌어 내는 주체가 다름 아닌 미타계 계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계원들은 불가에 귀의한 몸으로 연간 몇 차례의 공식적인 모임인 契會에 참석하여 불도를 닦으면서 수양하였고, 계원들의 사망 시에 靈駕志에 기록하여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를 올리는 것을 들 수 있다.
숙종 연간에 작성된 계첩에서는 전 순장(前 巡將)․안일호장(安逸戶長)․호장(戶長)․공사원(公事員) 등의 직함을 가진 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화재로 소실된 계첩을 중수하기 위해 부사(府司)에 보관 중이던 또 하나의 계첩을 찾아냈다거나, 계를 중수하기 위해 사재를 투입하였다거나, 부사(府司)를 계주인(契主人)으로 설정하는 것이나, 계첩의 서문을 짓는 일이나, 계의 규칙을 정비하는 등 제반사를 이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직함은 모두 지방 관아에 종사하는 인물이었고, 아울러 중인신분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밝히는 미타계의 내력 중에서 ‘中年에 士夫들이 불교를 左道로 규정하고 이 계의 계승이 단절되었으나, 서민들 중에서 뜻있는 자들이 계를 계승하였고, 이제 자신들이 이 계를 이 지방의 成俗․傳統으로 규정하고 중창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미타계가 조선 초기에 숭유억불책의 영향으로 위축되었다가 숙종 연간에 활성화 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고, 이제 이 역할을 지방관아에서 종사하다가 퇴직한 안일호장 층과 현직 호장이 함께 미타계의 주도세력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전․현직 호장층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낭원대사와 그의 스승 범일국사에까지 이른다고 하면, 이들의 사회적 역할에서 강릉단오제의 제 양상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이들이 활동하던 동일한 시기에 ‘대관령국사성황제’가 재정립되고, ‘관노가면극’이 연출되고, ‘대관령국사여성황사’가 설정되고, 강릉농악이 활성화되었다고 한다면, 이들의 역할과 강릉단오제의 제 양상이 갖는 상관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설명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것이 단오제의 숨은 이야기일 수 있다면 더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 같다.
금란반월회는 이 지방 젊은 선비들의 學契이고, 모선계는 자신들의 선조를 숭앙하고 선양하기 위한 宗契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이 지방에 널리 인지되어 있어 여기서는 장황한 설명을 줄이고자 한다. 다만 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부언하자고 하면, 먼저 창계 당시의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목적과 취지 및 사회적 역할 등을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본다. 다음은 후대에 이르면서 나타나게 되는 계의 변화양상이나 후인들의 추모양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계 당시의 양상과 후인들의 추모 양상을 구분하여 단계적이고 체계적으로 계의 변화 발전 양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부언하였다.
끝으로 이번 번안 작업을 마련해 준 김진선 이사장님을 비롯한 율곡교육원에 감사드리며, 실무적인 기획과 추진에 애써주신 정문교 원장님께도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발간사
『강릉지반 향약‧계 자료』의 해제 / 이규대…9
연곡향약문(連谷鄕約文)…15
성산목린상중하계좌목(城山睦隣上中下契座目)…25
성산면향약절목(城山面鄕約節目)…30
성산향약계좌목(城山鄕約禊座目)…42
정동면향약절목(丁洞面鄕約節目)…45
향약입의(鄕約立議)…57
초당동약계절목(草堂洞約禊節目)…62
초당동약령(草堂洞約令)…66
하남면향약계열조성책(河南面鄕約禊列條成冊)…74
하시동촌약계입조(下詩洞村約禊立條)…89
하시동강신계조약(下詩洞講信契條約)…96
금란반월계세계도(金蘭半月契世系圖)…99
삼오제기(三五儕記)…104
약계입의(藥禊立議)…108
약계선안(藥禊仙案)…115
모선계실기(慕先契實記)…126
계추재 문생계첩(桂秋齋門生契帖)…156
경락첩(鏡洛帖)…159
문생계서(門生契序) 임자 3월…163
송호사우계 서(松湖四友契序)…165
향서당(鄕序堂) 『眞珠誌』…168
신구유통행 절목(新舊儒通行節目) 『鄕校實記』(1933)…172
통행문급 절목(通行文及節目) 광해군 갑인(1614)…177
임영족회첩 서(臨瀛族會帖序) 제1…183
경술첩 서(庚戌帖序) 제2…187
무오첩 서(戊午帖序) 제3…188
족회첩 후발(族會帖後跋)…192
기미첩 서(己未帖序) 제4…195
임인첩 서(壬寅帖序) 제5…196
제임영족회첩 후(題臨瀛族會帖後)…198
안변향임 서문[安邊鄕任序]…
향음주의 서문[鄕飮酒義序]…
미타계(彌陀契)…206